정신병의 나라에서 왔습니다.

책의 모든 부분이 아프다.


  • 나는 물론 사회에 소속돼 직업 활동을 하고 임금을 받고 소비를 하고 생활환경을 구축하고 사람들에게 소속되는 일을 마땅히 해야한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반드시 겪지 않아도 되었을 고통을 생각하면 지독한 기분이 든다. 어떤 사람들은 몰라도 돼는 병의 세계. 왜 그런 얘기를 꺼내냐고 반문하는 세계의 사람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저지른 네가 잘못이라고 비난하는 이들을 기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생을 잇기 위해 뛰어드는 이들을 생각한다.

  • 당신이 병적 상태에서 아무리 계산하고 생각하고 예측해서 발걸음을 디뎌도 그 길은 당신이 원했던 방향으로 당신을 안내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미 병이 침입한 상태로 병을 다루려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 “이것도 곧 지나가리라.”라는 말처럼, “지금 병원에 가라.”라는 말 또한 우리에게 언제든 실천할 수 있는 잠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옷을 꿰입은 후 병원에 가 고백한다. 이어지는 치료와 치료의 망망대해에 닻을 내린다. 우리는 병식을 가졌으니까.

  • 한 아름 약을 끼고 느린 걸음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저 조증자에게 신이 있다면 신의 가호가, 사람이 있다면 사람의 애정이 깃들게 하소서.

  • 그리고 폐허 속에서 우리는 그의 옛날을 어렴풋이 발견한다. 그가 발병 이전에 가졌던 슬픔과 기쁨, 누군가의 이름, 과거에 추구했던 정치성 등이 잔존한다는 것에 대해 만감이 교차한다. 그는 심지어 옛날과 같은 농담을 하며 비슷한 농담에 웃기도 한다. 사라지는 것과 남는 것이 체계적이지 못하므로, 우리가 상실의 속도를 따라잡거나 잔존하는 것들을 보관하려는 노력은 헛되고 때로는 그것에 배신감을 느낄 수도 있다.

  • 망상 속 행복에서 살고 싶고 약을 거부하고 싶은데도 약물 치료를 이어나가는 노력은 정말 놀라운 것이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알 수 없는 일의 해답을 찾기 위해 끝없는 노정을 계속해야 하기에, 그것이 병식이 강화되는 방향이든 병이 강화되는 방향이든 이들은 존재 자체로 고난의 길을 겪고 있다.

  • 정신이 망가진 사람이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마지막까지 해치는 대상은 자기 자신이다. 특히 자기 자신의 육체다.

  • (…) 나아지기는커녕 지금 상태에서 더 나빠지지 않게 간신히 정신을 붙잡고 있을 뿐이라는 비참함을 정신병이 없는 사람들은 모른다. 그리고 그런 비참한 상태가 마치 질 좋은 양분인 양 혹처럼 돋아나는 새로운 질병들의 존재가 얼마나 사람을 괴롭게 하는지, 그것은 정말로 아무도 모른다.

  • 어찌 됐든 정보들을 접하게 되면 우리는 그 정보를 왜곡해서라도 이해한다. 많은 이들이 처음 정신과에서 진단을 받으면 공통된 반응을 보인다. ‘아아, 그랬구나. 그래서 그런 거였구나.’ 자기 자신의 병에 대해 ‘안다’는 사실이 우리를 얼마나 다행스럽게 하는지! 약물에 대한 정보를 차곡차곡 쌓아가는 것도 마찬가지다. (…) 그러면 나는 느끼는 것이다. ‘아아, 그랬구나. 그래서 그런 거였구나.’

  • 처음 우리는 정신과 의사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으려고 한다. 그다음 우리는 정신과 의사에게 부족한 맥락을 설명하려고 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런 전달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병원을 떠난다.

  • 정신과 의사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복잡한 까닭은, 처음 정신과 진료실에 들어가면 이제까지 쌓아놓았던 모든 이야기가 떼로 물려들어 자기가 먼저 말하려고 아우성치기 때문이다.

  • 정신병은 역사와 대적한다. 정신병은 가장 먼저 시간을 부순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따위를 모조리 상관없게 만든다. 인식할 수 있는 시간의 범위가 짧아진다. 대신 이것을 하면, 저것을 하면, 무엇을 해내면, 잘해내면 마치 그 찰나의 순간만 내가 어디에 있는지 보이는 느낌만 갖고 어둑한 안개를 지난다. 조증이 푸른 도깨비불처럼 앞길을 인도하고 그래서 안도한다. 병증으로 기인한 상태를 병에 의존해 타개하려 한다.

  • 정신병을 짊어지고 그것을 밝히지 못하며 병증으로 인한 수모를 겪어도 이것은 다 자기 탓이라고 스스로를 탓하는 이들을 알고 있다. 그러니 괜찮냐고 묻지 마시라. 우리는 괜찮지 않으므로, 이 영토에 발 들인 모두 괜찮지 않으므로.

  •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들은 우리의 고통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다. (…) 병의 초기에 사람들은 으레 자신에게 찾아오는 불안과 초조, 견딜 수 없는 기분, 돌연 폭발하는 충동들을 설명하는 데 곤욕을 겪는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된다. 자신은 지금 역어로 말한다는 것. 모든 고통은 번역어로서 존재한다는 것. 그러므로 자신은 평생 이 기분과 고통을 타인에게 전달할 수 없을 거라는 점.

  • 결국 언어, 바로 모국어가 자신을 버린 느낌이야말로 정신질환을 통해 경험할 수 있는 최악의 순간 중 하나다. 이미 죽고 싶어 하는 이들이 너무 많아서 단순한 ‘죽고 싶다’쯤은 죽음의 레이스에 명함도 내밀지 못한다. 입속으로 죽음을 곱씹으며 다니지만, 더는 자신이 표현하는 죽음에 무게가 없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더욱 죽음을 자조하며 우스꽝스럽게 말하지만 경박해 보일 뿐이다. 당신의 ‘죽고 싶다’는 이미 널리 통용되는 ‘죽고 싶다’ 아래에서 흐드러진다. 본인이 느끼는 바로 그 특별하고 특유한, 자신을 절망케 하는 유일한 ‘죽고 싶다’를 아는 사람은 없다.

  • 정신병자들에게, 특히 정신증자에게 기억은 모호하다. 기억은 아름답고 괴팍하며, 한 자리에서 서성이고 있다. 기억은 되려 기억하는 자를 구경하기도 하고, 실체가 없는 주제에 생물의 행동을 한다. 기억은 고유한 생명력을 갖고 있기에 기억과 인간 간의 균형이 어그러지면 쉽게 돌아오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기억을 넘지 못하고, 자신의 일부를 조금 두고 온다. 기록은 그것을 건지려 펴는 그물이며 기억을 유혹하는 낚싯대로, 모든 파편을 주워 완전한 형상이 다시 되기를 염원하나 이미 병자들의 삶은 기억에서 멀어지고 일상은 달라져 있기 때문에 그것은 주인 없는 기억으로 떠돈다.

  • 때로 기록이라는 것을 영구히 포기하는 사람도 있다. 사실 그렇다. 써도 잊고, 쓰지 않아도 잊는다. 반드시 써두어야 살아남는 건 아니다. 하지만 기억을 기록하는 사람은 다시 기록으로써 기억하는 사람이 된다.

  • 기록은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기다리다가 다가오는 당신을 따뜻이 맞이하며 구원해주지 않는다. 고통과 아픔이 어떤 임계를 넘으면 다른 지평이 열릴 것이라 생각하지만 실제로 기록들이 당신에게 제공하는 것은 배신감뿐일 수도 있다. 그 배신감은 병증이 바람직하지 못함을 미리 알고 있어도 병을 이룩하는 실수들을 되풀이하며, 과거의 실책을 반복하고, 내가 반목했던 나의 부모처럼 굴며, 결심을 뒤엎고 되돌아가는 자신의 자취에서 온다.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구나!” 하고 탄식하게 만드는 것이다.

  • 그러나 기록이 우리의 구원이 되지 못하고, 어떤 문도 열지 못하고 그리하여 기록에 패배하더라도, 그 패배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도생을 위해 제 기억을 조형해나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 자해를 끊는 방법은 없다. 자해하지 않는 인간이 되는 것뿐이다. 즉각적이고 바로 실현 가능한 자해와 오랜 시간 공들여 죽어가는 먼 자해가 존재하고, 후자가 자해에 덜 가까운 것처럼 보일 뿐이다.

  • 아이러니하게도 자살에 대해 다양한 질문과 답을 하는 동안 우리의 삶은 지속된다.

  • 살아남아 고개를 돌려 확인하게 되는 세상은 전과 같고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는데 자신은 더 이상 과거의 자신이 될 수 없음을.

  • 고통을 맞닥뜨렸을 때 자신의 존엄을 지켜내는 일은 숭고하다. 그러나 숭고한 일만 벌어질까. 사실 그의 내면은 정말로 비참과 아픔으로 고래고래 흉측한 소리를 지르고 있을 수도 있다. 그의 내부는 너무나 망가졌기 때문에, 그는 자기가 소리 지르는 것을 들으면서, 또 소리 지르는 이유를 알면서 시끄럽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비명, 소음으로 인해 또 병이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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